[01] 고요의 바다 - Stille Nacht, heilige Nacht

2023. 2. 17. 18:55

2439년 8월 1일 오후 6시

 

우리는 레스터 스퀘어 역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다. 테이블 네 개 정도의 협소한 공간. 넓은 창밖으로 장난감처럼 작아진, 하얀 눈으로 덮인 런던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나를 불러낸 사람은, 한 손에 짧아진 담배를 들고 남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지겹도록 이어진 설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셰익스피어 동상 부근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날 것이라는 듯 하염없이. 나는 그 숨 막히는 광경에 잠깐 고무되었다가, 우산을 내려놓은 후 자리에 앉았다.

시릴은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 재떨이에 담배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프레세페 성단 근처의 행성을 샀어.」 

「다음 주면 이곳에 없을 거야.」  무척이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시선을 돌리면, 과연 그의 손 옆에 편도 티켓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익숙한 로고가 그려진.

「축하해.」 나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건너편에 설치된 전신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어떤 대답을 어떤 표정으로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상대는 아무런 의미 없이 다음 말을 뱉는다.

「잘 지냈어?」

「아마도.」

「계속 이곳에 남을 거야?」

「어쩔 수 없지.」

당시의 나는,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우주여행 티켓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날이 놀라운 속도로 공석이 채워졌다. 태양계, 이웃 은하, 그리고 영원처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자들은 사라져갔다. 요람에서 벗어난 자들은 모든 미련을 떨쳐낸 듯 돌아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지상에 쌓인 눈은 점차 차갑고 단단해졌다. 「아쉽네, 네가 바란다면 한 장 더 샀을 거야.」 표를 구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요구되었으나, 상대는 마치 커피 한 잔 더 주문하는 듯한 무게로 그런 소릴 했다. 매출 관리를 할 때마다 오가는 숫자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금액 역시. 하지만 아무리 백만장자라 하더라도 지금의 영국에서는 산호 문진 하나 살 수 없다. 아름다운 것들은 더는 제작되지 않고, 그들의 도면 또한 눈벌판 아래 묻혔다.

「거짓말.」

「거짓말 안 해.」

드디어 시선이 얽혔지만, 나는 텅 빈 회색 눈동자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아쉽네. 곧 생일이잖아.」 

「그러니까 가는 거야. 저기요, 여기 에스프레소 한 잔 더 주세요. 너도 알고 있었잖아?」

「…무슨 뜻이야?」

「…….」

카페 점원이 은쟁반에 잔을 내오기까지 시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죽 가방에 손을 넣고 한참이나 뒤적거리다가 양장본 한 권을 꺼냈다. 「아무튼, 단테. 네가 빌려준 책 돌려줄게.」

푸른 표지에 금박으로 제목이 쓰인, 끈 이론을 다룬 책이다. 회사 창고에 아무렇게나 비치되어 있었기에 그에게 빌려주었다. 개인적으로는 관심 없는 분야지만 시릴이라면 흥미롭게 읽으리라 생각했다. 책을 전달한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천체관측소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런 일도 오늘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전부 이해가 된다. 몇백 년 전에는 8월이 여름이었다잖아. 너는 겨울에 태어났을 것 같은 사람인데.

「재미있게 읽었어.」

「그냥 너 가져. 이것 하나 없어져 봤자 아무도 신경 안 쓸걸.」

그러니까 결국 이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이, 지구에서 영영 사라진다고 했을 때 느낄 그리움 따위.

어딘가의 라디오에서 반세기 전의 재즈 곡이 흐른다. 검은 구름으로 덮여버린 하늘에서 끊임없이 눈이 떨어진다. 침묵을 즐길 만한 사이도 아닌 주제에 꺼내지 못한 언어가 공기 중 흘러가도록, 오랫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월 9일이 시릴 메이스필드의 생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만날 약속은 잡지 않는다. 때가 되면 적당한 선물을 사서 우편으로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 석 달 후면 자신이 무엇을 선물했고 어떤 말을 전했는지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할 수 없고, 우리의 관계는 천체의 단위로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고 눈앞의 사람이 말한다. 차분하고 날카롭게. 그것은 언어와 공기로 만들어진 칼날 같다. 어쩌면 종이 하나 자를 수 없는 페이퍼나이프일지 모른다. 무의식중 손을 베여 피를 흘리고, 나중에 알아채면 일순 고통이 덮치듯, 나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원망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지금이라도 케이크 살까?」

「괜찮아.」 그는 조금 소리 내 웃다가, 천천히 일어선다. 「하고 싶은 말은 끝. 너는?」

「나도……괜찮아.」 자신에게 들려주듯, 나는 대답한다.

상대는 작별 인사 없이 돌아섰다.

나는 카페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들이 불협화음을 내고, 그 소리마저 전부 흩어져버릴 때까지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다시 한참이나 머물다가, 아홉 시가 되기 직전 바깥으로 나섰다.




2439년 8월 9일 오후 11시

 

누군가 검은 레인 코트를 입고, 종아리 끝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채 낯익은 문패 앞에 서 있다. 심호흡. 확인차 문손잡이를 돌린다. 열려 있다.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몸이 통과할 최소한의 분량을 당긴 다음 발소리 내지 않고 어두운 공간 속 들어선다. 밤의 부드러운 공기 속 두꺼운 카펫을 밟으며, 낡은 종이 냄새가 가득한 복도를 지나 타인의 행적을 찾으며. 그리고 대본의 다음 장이 진행되듯이─찾아 헤매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 

상대는 또다시 창문 앞에 서 있다. 달빛이 흰 커튼을 통과하고, 바닥에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그들은 재회의 인사를 나누지 않고 연극은 계속 진행된다. 불청객은 품속에서 날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나이프를 꺼낸다. 두 걸음 만에 목표에게 다가서고 칼날을 심장 깊이 찔러넣는다. 코트 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같은 속도로, 장갑 낀 손 위로 다량의 피가 흐르다가 나무 바닥 위로 툭, 툭,

툭.

낙하한다. 손을 비틀면 근육과 뼈가 끊어지는 느낌이 둔탁하게 전해져 오고 뺨에 혈흔이 튄다.  

 

숨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그는 죽는다.

 

영혼을 잃은 몸은 힘없이 쓰러진다. 극은 끝난다. 그러나 단테 리히터는 시릴 메이스필드가 줄곧 바라보고 있던 원형 테이블 위에서 푸른 양장본 한 권을 발견하고, 펼친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가름끈 옆 놓인 것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티켓. 그것을 들어 올린다. 일 분 정도의 침묵. 마침내 그는, 그때까지 계속 타오르고 있던 벽난로 앞까지 가 화염 속에 표를 던진다.

 

재는 흑연처럼 부서지고, 어둠 속 짧은 한숨이 남았다.

 

 


우주 여행은 거짓말. 회사(정부)는 구매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육체를 회수, 장기 밀매 등의 일에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