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미치소라 - 불청객

2023. 2. 17. 18:56

34번째 기록

담당자 미야자키 쇼코

금일 실험체의 부적격 판정을 확인. 일상적인 생활을 비롯한 신진대사에는 문제가 없음. 그러나 대상의 자발적 이계탈출 능력 부재. 해당 케이스는 처음 관찰된 것으로 실험체의 근간 능력이 자연적으로 소멸된 것인지 누적된 이계화의 결과인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임. 실험체 폐기 일자를 늦추고 유예 기간 동안 구제 임무 대신 연구를 진행. 구제 임무는 오리지널과 다른 레플리카 한 개체를 별도로 생산하여 진행하는 것으로... ... (이하 생략.)

 

 

 

불청객

 

 

 

“그래서, 당분간은 임무도 없고?”

“…네. 그래도 이계로 전이될 위험성은 여전히 있어서, 연구소를 벗어나는건 무리지만.”

“뭐야… 어디 좀 데려가 주려고 했더니.”

녹차 프라푸치노 겉면에 맺힌 물방울이 매끈한 흰 카페 테이블 위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그 안에 맺힌 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답한다. 소라 씨도 회사 일로 바쁘면서. 물색 눈동자의 남자는 웃고 있지만 보기 지루해질 정도로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다. 오히려 그 점이 낯설게 느껴져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가 왼쪽 손을 들어올려 포크를 집으면,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똑같이 포크를 집는다. 주의 깊게 관찰하던 시야에 깨끗한 손등이 들어온다. 연한 색의 네일을 바른 여자의 손은 웅덩이를 완전히 쓸고 지나간 길을 남기고 복구될 수 조차 없게 프라푸치노 컵을 들어올린다. 테이블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에서 똑같이 행동하는 도플갱어 한 쌍의 식사는 어이없을 만큼 허무하게 끝났다. 

“기쁘지는 않고? 이제 자유롭잖아.”

자유? 미치가 되묻는다.

응, 자유. 소라가 눈을 쳐다보며 답한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가는 일반인의 삶.”

문득 소라와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녀의 팔은 맥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잘리고 노이즈를 일으키는 전선 회로 대신 근섬유와 혈관이 피를 흩뿌릴 테니 엄연히 따지면 구성성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이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유가 있는 삶은 없다고 누군가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미치는 이 말을 듣는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고, 그 둘이 같은 사람이다. 이전에 듣고 싶었던 말을 스스로 입에 올리는 소라를 보고 미치는 기억 대신 프로토콜에 새겨진 물음표의 답을 구한다. 그 답이 잔인하게 느껴져 속이 끓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외면해야 했다. 

“난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

“뭔데?”

“기다리는 거.”

“저번에는 폐기되는 거라고 하지 않았니.”

미치가 망설이는 사이 소라가 프라푸치노를 빨대로 쭉 빨아들인다. 투명한 컵 속 연두색 액체가 줄어든다. 컵 아래에 아까만한 웅덩이가 생기는 일은 아마 없으리라. 그런 확신을 가지고 미치는 텅 빈 접시에 포크로 남은 케이크 시럽을 긁어모은다. 끈적하게 포크에 엉켜 잘 되지 않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시도한다. 대꾸할 말이 생각날 때까지.

“...... 바뀌었어.”

“뭐, 삶의 목표 같은 건 자주 바뀌는 거니까. 뭘 기다리는데?”

“오지 않을 것.”

“그건 헛수고잖아.”

“너무하네.”

느릿하게 웃는 미치의 얼굴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던 소라가 돌연 미치가 갉작이던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일어선다.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치맛단이 나부낀다. 지체없이 카운터에 접시를 반환한 그녀는 한참 뒤 작은 조각 케익 한 접시와 함께 돌아온다. 베이커리도 아닌데 어디서 구한 건지 불 붙은 작은 초도 하나 꽂혀 있다. 흔들리는 불빛이 유난히 밝다는 감상이 들자 날이 저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겨울은 유난히 해가 빨리 진다. 거리의 사람들이 하나 둘 겉옷을 껴입고 발을 재촉해 귀가한다. 유감스럽게도 눈 앞의 사람과 상황은 풍경에 시선을 뺏길 시간조차 없이 막무가내였다.

“...이게 뭐야? 소라 씨.”

“생일 케이크.”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데.”

“오롯이 를 위해 살 수 있는 기간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그걸 살아간다고 해. 그러니까 너는 오늘 태어난 거야. 미치는 소라의 이런 점이 가끔은 좀 무서웠다. 성격 좀 죽이라니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 낭만적인 붉은 촛불에 어른거리는 엷은 미소가 자신이 오래 붙잡고 기다리던 것을 빼앗기 위해 찾아온 저승사자의 얼굴로 보인다.

“소원 빌면서 불어 봐. 신이 한 번은 들어줄 테니까.”

거리의 소음에 묻혀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인데도 똑똑히 귀에 꽂힌다.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자 하얀 소라의 머리칼도 푸르게 보였다. 눈 녹듯 말이 새어나왔다.

“잔인하네.”

한숨처럼 내뱉은 숨에 불꽃이 흔들리다 점멸한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거리에 놓인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 거짓말보다 달콤한 진실로,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이기를 세계가 종용한다. 미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연결된 악연이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보자 촛불 따위보다 훨씬 선명하게 소라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틀림없는 백발이다. 그러나 미치는 소원이 이루어졌고, 최악의 손님이 자신을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미마타 미치는 미마타 미치, 아즈마에 소라는 아즈마에 소라.

“소원 뭐 빌었어?”

“...나는,”

설령 그것이 레플리카거나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해도.

“소라 씨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