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웨이츠 - 殘海(잔해)

2023. 2. 17. 18:56

제일장. 정월은 숨을 삼키는 달이며

 

겨울 바람은 살을 에듯 몰아쳤다. 계절의 끝무렵, 땅은 불타고 폐허 위로 먼지가 쌓일지언정 추위는 몸 물릴 줄을 몰랐다. 문풍지 끄트머리 틈으로 끝끝내 발을 들이는 냉풍이 있었다. “이월을 두어 시샘달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구나.” 여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리다 말고 바람에 묻혔다. 해풍도 이리 거세진 않을 텐데. 한숨이 바람과 섞였다.

국호 절반 차지한 바다 해 자 무색하게도 연해국엔 바다가 없었다. 북쪽 끄트머리에 작은 연안이 있기는 했으나 수도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다를 모르고 살았다. 있구나 하여 개념으로 알아둘 뿐.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배운 것 많고 견문 넓다 하나 그만치 운신에 제한 걸리기 마련이라, 여자는 바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여름 바다는 맑고 푸르되 겨울 바다는 검고 깊다 했으나 알지 못했다. 모래사장 위로 부서지는 흰 포말, 짠내 섞인 바람, 시야 아득하게 메우는 수평선….글로만 읽었음에 통탄스러울 따름이나,

대신 여자는 이월의 바다를 하나 알았다.

 

“익아.”

그의 바다.

여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하던 수면의 빛깔을 알았다. 포말 일으켜 파도치지 않아도 좋다. 대양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지 않으니. 여자는 이름자 호명할 적에 아주 잠시간 일렁이는 그 푸른 빛깔을 알았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동요가 아니었다. 그보단 규칙적인 박동이라 칭할 수 있는 것. 바다의 삶을 증명하는 익숙한 믿음. 네 눈, 쪽물 한 번 담가 들인 빛깔 같아. 그리 말한 적이 있었지. 가을 한낮의 높은 하늘색도, 청금석의 깊은 남색도 아니었지만 그 옅고 푸른 눈은 여자의 안식이 되곤 했다.

지금은 그 눈 곱게 감겨 있지만.

“외풍이 들어 춥지. 궁인들이 바쁜 모양이야. 불러도 오질 않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동궁을 계속 쓰겠다 할 것을 그랬어. 여자는 중얼거렸다. 바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많이 피곤한 성 싶구나. 눈을 접어 웃는다. 익이 네가 나보다 먼저 잠든 일이 손에 꼽힐 지경이건만. 그렇지 않니. 얼마나 피곤했으면.

“네 침소는 그래도 바람이 덜 들지 않을까 싶어. 그런 곳으로 골라 주었으니.”

답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중얼거림을 이었다.

“다녀올게. 확인만 해 보고 올 생각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테야.”

같은 말을 적어둔 종이를 곱게 접어 머리맡에 놓아둔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홀겹 옷자락이 팔락였다. 여자는 추위를 모르고 살았다. 원체 체질이 건강했던 게지. 상처를 입어도 아무는 것이 네댓 배 빨랐고 살 에는 바람에도 눈 깜짝이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익이는 추위를 제법 타니까. 따듯한 곳으로 가야지. 갈라진 흙바닥 위로 버선발이 가볍게 자국을 찍었다. 나는 듯 걸음 옮기는 여자의 목적지는 궁의 서쪽이었다.






 

 이 가의 해익입니다. 이름 자 하나 들은 것이 전부라 이리 짧게 글을 씁니다. 하해와 같은 아량을 바랍니다. 

그림자조차 걸음치 않는 저택에 낭자께서 방문해 주시어 일순 봄날 든 착각 들었습니다. 남은 것 하나 없는 가문에 그리 기품 있는 규수께서 걸음 주신 것이 당돌키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여, 그대 누군지 아버지께 여쭈었으나 답을 회피하시어 추후 여쭙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 다만 그대 필시 귀인이리라 의심치 않아, 제 태도 어쭙잖았음에 이 지면 빌려 사과 올립니다. 아버지 이르시기를 그대 이른 시일 내 다시 방문해 주실 것이며, 그날이 낭자의 탄일과 가까우니 축하의 의미 담은 서신 한 장 쓰며 글공부 거듭하는 것이 어떻냐 말하시기에 그리 행하고 있습니다. 허나 부끄럽게도 제게 또래 친구 하나 없어 축하 인사드리는 것이 참 서투릅니다. 그대께서 편지로라도 제 말벗 되어주신다면 일신 다스리며 마음 갈고닦는 것에 전념하기 보다 쉬우리라 여깁니다. 

 지난번 뵈었을 때 빌려주신 책 구절이 마음에 남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습니다. 古文觀止 이르시기를 깃이 비대해야 더욱 높이 날 수 있다 전하였습니다. 더욱이 학업에 열중하여 제 이름처럼 날개 살찌운다면, 비록 이토록 뼈대만 남은 가문이라 한들 이 연해 위해 헌신할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언제쯤 걸음 하여 주실런지 학수고대 중입니다. 저택 곳곳 동백꽃 만개하여 겨울의 아름다움 설파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광경이오니 아무쪼록 너무 늦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다음에는 하천 산책을 함께 하면 어떨까요. 일월의 마지막 겨누는 시기가 되거든 살얼음이 예쁘게 설어 꼭 거울같이 우리 모습 비추곤 합니다. 몇 안 되는 이 고을의 자랑과 같은 풍경을,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또 만납시다.

 

李海翼

추신,

혹여나 폐 되지 않는다면, 지난번 주신 약과를 시장 어느 골목에서 사셨는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입맛에 참 잘 맞았습니다.







제이장. 이월은 뿌리를 뻗는 달이라 하였으매

 

아차.

말라붙은 궁을 절반쯤 건너던 여자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 이걸 챙겨와 버렸네…. 난감한 시선이 여자의 손께, 잘 말려 들린 서신 몇 통을 향했다. 나도 참. 추워서 그런가, 깜빡깜빡 한다니까.

“그냥 들고 가면 먼지가 묻을 텐데….”

방을 나오기 전까지 여자가 읽던 글들이었다. 손때 묻을세라 함에 넣고 벽장에 다시 넣어 보관했지만 시간의 흔적은 감추기 어려웠다. 몇 번이고 펼쳐본 흔적도 마찬가지.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은 펼쳐볼 때마다 두어 번 쓰다듬기까지 했는지 그 근처만 맨들거릴 수준이었다.

여자는 어둑하니 재 날리는 검은 하늘과, 제가 지금껏 걸어온 거리를 가늠했다. 두고 오자니 시간이 걸리고, 들고 가자니 서신이 망가질까 걱정이고. 단순한 계산 몇 개가 빠르게 여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결론 내리는 것도 금세였다. 익이를 혼자 오래 두면 안 돼. 추운 곳에서 눈을 떴는데 나마저 없으면 얼마나 놀랄까. 무섭지는 않을까. 분명 걱정할 텐데. 하여, 여자는 서신을 꼭꼭 말아 품에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걷노라니 기이하게도 웃음이 났다. 겨울 바람은 여자의 왕래를 막을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러했듯.

 

그래. 늘 그랬다. 걸음 걷는 자국마다 익숙한 기억이 소용돌이마냥 움텄다.

정월의 마지막 주가 되면 연해국은 들썩였다. 국왕 해린의 탄신일이 그때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 이전에는 적통의 후계자였고, 후계자가 되기 이전에도 영특한 왕녀였기에 나라는 밤을 새워 가며 그 생일을 축하하곤 했다. 상점가에는 푸르고 붉은 초롱이 걸렸고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었다. 관리들이 민가에 곡식을 푸는 날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찾아오는 하얀 수호령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목길을 뛰놀았다. 관습이 그리 된 데에는 해린 자신의 의지도 한몫했다.

- 전하, 아니, 아바마마. 소녀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 무엇이기에 부득불 찾아와 청하느냐. 편하게 말해보거라.

- 제 탄신일을 이용해 구휼에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 위치한 날이다. 보릿고개까진 날이 남았다 한들 사람들은 추위에 떨고 배를 곪았다. 궁에서 잔치가 벌어져 봤자 서민들은 화려한 불꽃을 먼발치서 보는 게 전부였다. 영글지 못한 아이 시절부터 여자는 그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 저 혼자 행복할 수는 없지 않겠나이까.

- 허.

- 하늘이 저를 정월 끝물, 겨울 한가운데에 내려주신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옵니다.

하여 어린 해린은 정월 중순부터 몰래 궁 밖을 나돌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겠다는 명목이었다. 손 필요한 사람을 찾으면 관리를 보내 쌀을 풀었다. 궁인들은 잔치의 주인공 되실 분이 자꾸만 사라진다며 투덜댔지만 정작 해린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쪽이 훨배 적성에 맞았다. 발간 빛으로 언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운 채 뛰어들어오는 왕녀를 보고 누가 화를 낼 수 있으랴. 후계자가 되고, 왕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에 유일한 차이 있었다면 뒤따르는 이의 존재쯤일까.






海鱗主公

 

 탄일 경하 드립니다. 소자 이 가의 해익입니다.

 몇 해 전 주공의 신분도 모른 채 어린 맘에 썼던 서신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입니다. 미리 알려주셨다면 그리 무례하게 올리진 않았을 터인데, 들 낯이 없습니다. 근래는 뵙지 못한지 오래되었지요. 과거 시험이 곧인지라 외부인의 출입을 전면 거부하였더니 아랫것들이 주공 또한 알아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혹은 저와 가문에게 있어선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니 부러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경을 치셔도 되었을 법 하신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세 달 남짓 남았던가요. 당당하게 등용문 올라 주공 곁에 서겠노라 약조 드립니다. 그 때에는 서신 아닌 목소리로 전달드릴 수 있는 말들이 많겠지요. 언제부턴가 주공께서 자택 걸음 해주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습니다. 그 계절마다 이 거리엔 어떤 꽃이 피는지, 백성들은 하루 건너 하루 무슨 노랫말을 중얼이는지, 아이의 웃음소리와 어른의 곡소리는 어찌하여 궁까지 닿질 않고 있는지…, 왕녀 저하께서 제게 물어보아 주실 때마다, 언젠가 저 맡아 일하게 될 나랏일 미리 체험하는 것 같아 몸 둘 바 모를 만치 감사했습니다. 그대께서 이 연해를 보살피게 되신다면 얼마나 무궁한 발전 이룩할까, 설레는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날 또한 많았습니다.

 이번 해에 등용에 성공한다면, 하여 이 한 몸 바쳐 열성 다해 일한다면 성년이 될 즈음에는 떳떳이 주공의 신하가 될 수 있겠지요. 제 능력으로 마침내. 제가 주공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하셨는지 모르실 텝니다. 받은 은혜를 어찌 갚아 드릴까 제 나름의 고민 깊었고, 종래 한 가지 결론 다다랐습니다. 제 능력으로 당당히 주공 옆자리 차지하게 된다면, 준비한 선물 무엇인지 고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李海翼

추신,

지난번 함부로 기대어 잠든 점은 죄송했습니다. 사유 묻지 않아 주어 감사드립니다.






제삼장. 오른 해 삼킨 숨 뻗은 뿌리 바람이 시샘하여도

 

언제부턴가 왕녀의 뒤엔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말만 그림자였지 이지 가져 사고하는 인간, 한 발 뒤에서 뒤따르는 올곧은 숨. 원체 정 많던 왕녀는 늘상 어디선가 버려진 것과 다친 것, 외면당한 것들을 찾아내 그러모아 돌보았다. 개중 인간 포함된 것 당연한 결과였다. 혹자는 왕녀가 수족을 들였다고 했었다. 아냐, 틀렸어….해린은 종종 생각했다. 여자가 찾아낸 것은 수족이 아니라 날개였으며 헤엄하는 지느러미 떠미는 해류였다. 목숨줄을 내어주어도 좋을 버팀목이었고 기대어 마땅할 안식처였다.

말간 웃음소리가 동궁을 삼키던 시절이 있었다.

왕녀는 잘 웃던 사람이었으나 소리내 웃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니까, 이 가의 아이가 자진하여 왕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림자가 생기고 빛은 색과 온기를 품었다.

"익아. 익아. 이걸 보렴."

"네. 주군."

"물망초가 잔뜩 피었어…아니, 둘만 있을 땐 린이라 부르라고 했는데도!"

바다. 해린은 두 사람의 이름에 생경하도록 박힌 그 글자가 좋았다.

 

이상하지. 익아. 지금도 뒤를 돌아보면 네가 따라올 것만 같은데. 여자는 갈라지고 서리 낀 바닥을 버선발로 꾹꾹 눌러 밟았다. 이렇게 걸으면 말이지, 네가 올 것만 같아. 신발을 두고 가셨습니다, 하고 따라올 것 같은데. 그러나 기대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익숙한 손의 무게가 어깨 위로 활옷을 덮어주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왕이 되었을 때, 여자가 바다에게 내어 준 침소는 궁의 가장 안자락에 위치했다. 뒤뜰이 가까운 곳. 볕이 잘 드는 곳. 비록 지금은 해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여자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으면 해사하게 볕 드는 내원이 그곳에 있었다. 불똥과 재로 뒤덮인 낡은 건물 말고. 갓 기와를 갈아 끼운 건물 말이야. 눈을 감고도 담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치십니다, 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 더.

침소는 단촐했다. 머무른 흔적이 거의 없었다. 익이는 바보야. 사람 사는 흔적 좀 두고 살랬는데. 여자는 속닥거렸다. 듣는 이 아무도 없음에도. "여긴 따듯하구나." 감탄사를 뱉고, "역시 이 곳을 네게 내어주길 잘 했어." 웃었다. "여기로 오자. 응. 밤은 추우니까. 추운 거 싫어하잖아. 그렇지…." 이상하게도 그 가는 목소리가 울음 섞인 것마냥 흔들릴 적에….

"아."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사람마냥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익이 생일이네."

실낱같은 달이 비추는 그림자가 멈추었다.

그의 바다는 이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主君

 

 탄일 경하 드립니다. 해익입니다.

 주군과 처음 만난 지도 어느덧 여덟 해가 다 되어 갑니다. 시간 많이도 흘러 저희에게도 여러 변화 있었지요. 그 시간 동안 성심껏 보살펴 주신 덕에 저도 어느덧 올해 성년입니다.

 모두들 저희 가문은 재기 어려울 것이라 평했습니다. 감히 주상에 불만 품고 반역 꾀한 지 백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허나 불손한 말 올리자면, 그것이 어린 제 맘에 썩 들진 않더랬지요. 제가 꾀한 반역이 아닐진대 어째서 대대손손 그 책임을 무겁게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겨울철 오면 양친께선 늘 더운물 조금 데워 제 이부자리에 놓아주셨고, 당신들께서는 하인들과 함께 추위에 떨며 잠드셨습니다. 저는 아무리 부모 자식 관계라 한들 그런 무도한 헌신 일방향으로 건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주군께서 가택을 방문해 주셨지요. 저는 그날이 제 인생의 시작점이라 여깁니다. 오롯한 헌신이 무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릇 뼈는 묻으나 이름은 묻지 못한다 하지요. 이제 같은 바다 안에서 헤엄하진 못해도, 주군의 뼈대 되고자 하는 이름으로 제 이름에 骸 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칼날 받아야 하거든 이 한 몸 기꺼이 주군의 피가 되고, 꺾여야 하거든 기쁘게 대신할 뼈가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군께선 제 이름 바꾸지 않아도 된다 거듭 말씀하셨다만, 신하 된 도리로서 감히 나라와 나라의 상징인 국왕의 이름자 쓸 수 없어 내린 결정이니, 아무쪼록 어여삐봐주시면 은혜에 감복하겠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주군 곁에 서는 날 오게 되면 편지 아닌 제 입술로 고백하는 말들이 더 많을 줄로 알았습니다. 헌데 나이를 조금 먹은 탓인지, 철이 거꾸로 들기라도 한지, 외려 뵙지 못할 적보다 담고 싶은 말이 한아름 쌓이는 것의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서신 보실 적엔 이미 성대히 연회 치른 후 휴식 취하고 계시겠지요. 저 어릴 적부터 이리 간결히 담소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으니, 이 짧은 글이 주군께 작은 즐거움이 되길 바랍니다.

 언제나 주군 뒤에 있습니다.

 

李骸翼

추신,

다음 번 시찰 때에는 군것질 더 넓게 허용해 드리겠습니다.

모처럼 선물 주셨던 약과가 먹고 싶기도 하고요.







제사장. 님 가신 동으로 남으로 나 따르오리니

 

이월의 마지막 날은 언제나 조용했다.

떠들썩하게 연회를 열어 줄까, 물었을 때 그의 바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주군께서 더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그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그래, 그러하마. 행복하게.

그리하여 이월의 마지막 날, 때때로 윤년이 찾아올 적엔 마지막 날의 전날, 여자는 궁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조그만 후원을 꼬박꼬박 찾았다. 그곳엔 바다가 있었다. 연회 대신 두 사람의 웃음이 있었다. 싹틔운 풀이라곤 하나도 없는 정원 앞에서, 올해는 무슨 꽃을 심을까 논하는 것이 소소한 의례나 다름없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 조용하구나."

입이 댓 발쯤 나온 여자가 툴툴거렸다. 그야 당연했다. 연해의 왕궁은 보름 전 몰려온 군과 하루 전 일어난 참상으로 텅 비어버린 것이 오래였으니. 궁인은커녕 머무는 자도 없었다. 누군가는 반만 성공한 혁명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반역이라 했으며 누군가는 천벌이라 했다. 그 날도 밤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재가 휘날리고 불똥이 튀어 밤이 밤 같지 않던….

"익이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하는데."

적막을 깨고 목소리가 흘렀다.

쌓인 재가 보이지도 않는지, 여자는 침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꽃을 꽂아두면 익이가 좋아할까. 그렇지만 꽃은 아직 피지 않았는걸. 좋아하던 약과를 사다 주면 어떨까. 하지만 그저께 저잣거리에 나갔을 때, 상점들이 다 문을 닫았더라. 새우꼬치는? 음. 그것도 구하기 어렵겠다. 뭣보다 주군이 먹고 싶은 것 아니냐며 한 소리 들을 게 뻔해. 쿡쿡 웃는 소리가 텅 빈 건물을 울리다가 흩어졌다.

"저런 짐이 있었던가. …누가 이미 생일 선물을 주고 간 거야?"

그제야 눈에 들어온 함 하나가 있었다.

최근 가져다둔 것처럼 먼지가 덜 쌓인 것. 주인 딴엔 깊숙이 숨겨두었으나 이 방에 수십, 수백 번 드나들었던 여자의 눈을 속이긴 어려웠다. 검게 칠해진 함에는 어떠한 무늬도 찍혀 있지 않았다. 건드리면 안 될 것만 같은 기운이 서렸다. 혹은, 익숙한 기운이.

"...익아?"

여자의 품에서 넣어두었던 서신이 툭, 떨어졌다.

여자는 함을 뒤적였다. 언 손이 모서리에 부딪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함 안에 든 것은 익숙한 연통이었다. 언제나 여자가 받아왔던, 곱게 말려 끈으로 묶여 도착하던 서신. 아니,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이 그곳에 있었다.




 

 

 편지가 부쳐지지 못함을 알아 온 지면에 마음을 쏟을까 합니다.

 이 고을의 거리는 쇠퇴하고 늘 황량한 바람이 붑니다. 이리 추운 곳 홀로 있자 하니, 주군께서 제게 처음 선물해주셨던 책을 떠올리게 합니다. 깃이 많지 않거든 높이 날 수 없다 하였거늘, 제 감히 그 곁에서 비상하고자 함이 거꾸로 죄업 되었나 봅니다. 소신 많은 것 바란 적 없습니다. 비록 서로를 탐하고 온전히 마음을 기댄 정인 아녔을지언정, 전 주군께 제 생을 모두 걸었습니다. 그것이 신하라면 신하로서, 반려라면 반려로서. 나라와 당신 위한다면 살과 뼈를 조각하여 바칠 수도 있었습니다. 허나 고한 적 없었던가요. 제 마음이 모자랐던가요?

홀로 이 맘 간직한 채 버리지 못할 적에 죽고자 했습니다. 혼백 공기 중 흩어지고 백골 그대 곁 토양 된다면 그때에는 제대로 보좌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할 수 있을까요. 무용한 망상임은 아오나 감히 그리 바랍니다. 길게 풀어 서술하는 것 참 재주에 맞지 않습니다. 간결히 적습니다.

 오랜 시간 연모했습니다. 행복하기를.

 






제오장. 먼저 가지 마옵시고 영영 기다리소서

 

어째서 이 편지는 주군에게 전해지지 않았던가?

왜 내게 보내지 않았지? 아. 여자가 알 리 만무했다. 편지를 적은 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끝까지 부치지 않았는지.

여자가 서신을 움켜쥐었다.

 

익아.

여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뛰었다. 안 돼. 재를 머금은 비가 내렸다. 가물기 그지없던 땅 위로 물이 떨어졌다. 하늘이 우는 것처럼. 그마저도 뜨거운 땅에 닿아 증기가 되어버렸지만.

익아.

심장께가 욱신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아닌데. 아프지 않은데. 극히 가까운 날 어드메 생긴 길쭉한 흉터가 쓰렸다. 심장을 지나 뒷등에까지 남은 검은 흉이 기이하게 존재감을 불렸다. 어제였던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아니야.

익아.

전부 꿈일 거야.

연해국의 마지막 왕이 단단히 미쳤다거나. 그리하여 마지막 충신이었던 자가 결국 반기를 들어 일어났다거나. 나라가 하늘로부터 버려졌다거나. 백성들이 피란을 떠나고 궁은 텅 비었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않니.

여자는 입이 닳도록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익아.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나 늘 윤년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네 생일 다음 날 하루가 더 생긴다고 좋아했는데. 마치 네 생일이 하루 더 있는 것 같다며. 겨울이 하루 더 있으니 그 하룻밤은 꼬박 쉬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리 해말간 웃음을 지었건만. 이상하다. 익아. 날이 저무는구나. 네 날이. 저물었구나.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돌아오는 길 내내 들고 뛴 서신의 먹이 번져 검은 강이 생겼으나 여자는 몰랐다. 알지 못했다. 그저 문을 열어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지. 이상해. 이상하다.

"익아."

겨울이 끝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네 생일인데. 오늘이 네 생일인데.

얼어붙은 눈이 녹아 흐르는 소리가, 꽃샘추위에 굴하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나무가 뿌리를 뻗는 소리가. 새순이 움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네가 무심하게 돌아가자고 읊던 말들이. 심장에 뿌리내려 박동케 하던 그 모든 음들이. 들리지 않는다. 네 심장 소리가. 발걸음이. 들리지 않아. 보이지 않아. 어째서일까. 익아. 겨울이 하루 더 남은 걸까. 올해는 윤년이 아닌데.

 

정월은 숨을 삼키는 달이며 이월은 뿌리 뻗는 달이라 하였다.

숨 삼키지 못하고 뿌리 뻗지도 못할 것은 어디로 가야 하나.

 

춥구나.

망국의 마지막 왕은 고개를 떨궜다. 나라를 끝에서부터 서서히 망가뜨린 왕이. 가장 충실했던 이의 손에 심장을 뚫렸던 주군이. 그러나 죽지 못했던 숨이.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그곳에 네가 있었다. 창백한 낯으로 눈 감은 이가. 마지막 충으로, 혹은 불충으로, 망가진 주군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을 함께 꿰뚫은 자가. 여자가 단 한 번도 걸음 딛어 만끽해본 적 없는 호흡이. 바다가.

아니, 그곳에 없었다. 이제는 없었다. 바다는 어디에도 없었다.

추워. 익아. 추워.

바다 잃어 비늘 한 자만 남은 숨이 끝내 바람을 먹었다.

해수 밖에서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도통 알지 못했다.